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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하지 않은데 행복하지도 않은 사람들 – ‘감정 무채색’ 시대의 일상

어느 날 문득, ‘내 삶은 나쁘지 않은데 왜 공허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당신도 아마 감정이 무채색이 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을지 모른다.

지금 우리는 전쟁도 없고, 극심한 가난도 없고, SNS 속에서는 모두가 웃고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불행하지 않은데, 행복하지도 않아요.”

이 글은 그 정체 모를 감정의 정체를 풀어보고, 왜 이런 감정들이 점점 더 일반화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나를 지키는 법에 대해 이야기해본다.


불행하지 않은데 행복하지도 않은 사람


1. 감정이 뚜렷하지 않은 시대의 도래

‘무채색 감정’이라는 신조어의 등장

예전에는 기쁨이면 웃고, 슬픔이면 울었다. 감정은 뚜렷했고, 그만큼 선명했다.
그런데 요즘은 다르다.
“행복하냐?”고 물으면 “글쎄요…”라는 대답이 더 자연스럽게 들릴 만큼, 감정은 어딘가 흐릿한 회색빛을 띠고 있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둔탁하게 떠 있는 기분. 명확한 기쁨도, 분명한 슬픔도 없는 상태.
그 중간 어딘가에 우리가 머물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등장한 단어들이 그 징후를 말해준다.
‘무기력’, ‘번아웃’, ‘정서적 평평함’, ‘감정 둔감화’ 등은 단지 심리학 용어가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집단적인 감정 상태를 대변하고 있다.
감정이 극단적으로 소모되는 사회에서, 오히려 사람들은 감정을 최소화하는 쪽을 택한다.
예민하지 않으려 하고, 덜 기대하려 하며, 무언가를 ‘크게 느끼지 않는 것’을 어른스러움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감정을 느끼는 감각 자체를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쁨이 오면 '이게 진짜 기쁜 걸까?' 하고 의심하고, 슬픔이 찾아와도 '이 정도는 다들 견디는 거니까'라며 눌러버린다.
이처럼 감정을 회색으로 덮어놓는 일이 일상이 되면서, 우리는 점점 더 ‘무채색 감정’ 속에 스며들고 있다.

분명히 살아가고 있는데, 살아내는 감정은 흐릿하고, 납작하고, 억눌려 있다.
그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조용하지만 분명한 정서적 징후다.


2. 행복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분명 괜찮은 하루였는데, 왜 허무할까?

하루를 돌아보면 별문제는 없었다.
일은 제시간에 마쳤고, 상사에게 칭찬도 들었고, 퇴근길엔 좋아하는 노래도 흘러나왔다.
누가 봐도 나쁘지 않은 하루.
그런데도 마음 한구석엔 설명할 수 없는 허전함이 가만히 앉아 있다.

“왜 이런 기분이 들지?”
스스로에게 물어봐도 뾰족한 이유는 없다.
슬픈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큰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저 ‘그냥’ 그런 날이 점점 늘어나고, 그 상태가 익숙해질수록 감정을 느끼는 기준이 희미해진다.

이 기분이 힘든 이유는, 어디에도 정확히 기대어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행복하지 않다”고 말하면, 누군가는 “그 정도면 괜찮은 거 아니야?”라고 되묻는다.
그래서 더 말하기 어렵다.
결국 우리는 그 애매한 감정을 혼자 껴안고, 이유 없는 무게감을 조용히 견디는 법을 익혀간다.

감정이라는 건 설명할 수 있어야만 존재를 인정받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일수록 더 진짜일 때가 많다.
행복하지 않은데 그 이유조차 명확하지 않다면, 어쩌면 그건 지금 우리 시대의 가장 보편적인 정서일지도 모른다.


3. 감정 피로 시대 – 기뻐야 할 타이밍에 기쁘지 않은 사람들

모든 것이 과잉인 세상에서 무뎌지는 마음

요즘은 기쁨조차 스케줄처럼 정해진다.
생일이면 축하를 받아야 하고, 연말이면 되돌아보며 감사해야 하며, 승진이나 결혼 같은 이벤트가 생기면 반드시 기뻐야 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SNS에는 “행복하다”, “감사하다”, “벅차다”는 말들이 넘쳐나지만,
막상 그 자리에 있는 당사자는 그 감정에 닿지 못하고 무언가 어긋난 기분을 느낄 때가 있다.

“분명히 기뻐야 하는 순간인데, 왜 아무 느낌도 없지?”
이런 감정은 말로 꺼내기도 애매하다.
주변에서는 “좋은 날인데 왜 그래?”, “감사해야지”라고 말하지만,
그 말들조차 부담스럽게 다가온다.
그래서 점점 더 감정을 숨기게 된다.

우리는 지금 감정 과잉의 시대를 살고 있다.
광고는 늘 '감동적인 무언가'를 약속하고,
드라마나 콘텐츠는 매 장면마다 울거나 웃게 만들고,
심지어 일상에서도 특별해야 한다는 압박을 끊임없이 받는다.

그런 과잉 속에서, 감정은 소모되고, 지치고, 무뎌진다.
감정을 느껴야 할 순간조차 ‘지금 기뻐해야 하나?’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그 순간의 감정은 지나가버리고, 우리는 아무런 여운도 느끼지 못한 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기뻐야 할 타이밍에 기쁘지 않은 건 문제가 아니라 현상이다.
그것은 당신이 무심하거나 냉소적인 게 아니라,
오히려 감정이 쉬어야 할 시간을 제대로 갖지 못한 채 살아왔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4. 감정의 기준이 ‘남’이 된 사회

SNS가 만든 타인의 행복 비교 시스템

요즘 사람들은 자기 감정조차 ‘남의 삶’에 맞춰 해석한다.
기쁨이나 만족, 성취 같은 감정도 내 안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게 아니라,
남들과 비교했을 때 ‘이 정도면 괜찮은 건가?’ 하고 외부 기준에 비추어 판단하는 감정 소비 구조에 익숙해졌다.

하루 일과 끝에 SNS를 켠다.
누군가는 발리에서 여유로운 풍경을 올리고, 누군가는 갓 장만한 신혼집을 자랑한다.
또 어떤 친구는 외국 유학 소식과 함께 새로운 커리어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 장면들은 마치 잘 찍힌 광고처럼 보이고,
그 안의 사람들은 실제 친구가 아니라 내가 따라잡아야 할 비교 대상이 된다.

나는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살았는데,
스크롤을 몇 번 내리는 사이, 내 삶은 갑자기 부족하고 단조롭게 느껴진다.
‘난 뭐 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밀려오고, 그 순간 감정의 기준은 완전히 바깥으로 옮겨져 있다.
내가 무엇을 느끼는지보다, 남들이 보기에 충분히 의미 있어 보이는지를 먼저 따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감정은 점점 ‘느끼는 것’에서 ‘맞춰가는 것’으로 변질된다.
기뻐야 할 순간에도 SNS에 올릴 만한 가치가 없으면 기쁘지 않고,
작은 성취가 있어도 남들에 비해 작다고 느껴지면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감정이 타인의 삶에 점령당하면서, 나만의 감정 체계는 무너져버린다.

결국 우리는 점점 더 감정을 느끼지 않게 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느끼지 않아도 되는 방식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감정은 퇴화하고, 우리는 ‘평범한 나의 하루’를 아무 감흥 없이 흘려보내며 살아간다.


5. 감정을 피로하게 만든 자기계발 중독

‘나를 성장시켜야 한다’는 강박 속 감정의 실종

요즘 우리는 쉰다는 것조차 불안해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휴식을 하더라도 책을 읽거나 운동을 하거나, 뭔가 나를 "업그레이드"하는 데 쓰지 않으면
어딘가 시간을 낭비한 것 같고, 뒤처지는 기분이 든다.
그만큼 우리는 성장이라는 단어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다.

자기계발서는 늘 말한다.
“더 열심히, 더 나답게, 더 잘 살아야 한다.”
자기계발 콘텐츠는, 잘 정리된 문장과 그럴듯한 통계,
그리고 몇 줄의 자극적인 문구로 우리를 몰아세운다.
하루를 반성하고, 목표를 세우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라고.

처음엔 그 말들이 동기부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는 스스로를 개선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
가만히 있는 날에는 스스로가 뒤처지는 느낌이 들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하루는 죄책감으로 남는다.
그렇게 쉴 틈 없이 달리는 삶 속에서, 어느 순간 감정을 느끼는 감각마저 사라진다.

감정이란, 속도를 늦출 때 비로소 들리는 내면의 목소리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바빠서, 너무 많은 걸 해야 해서,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지금 어떤 감정이 드나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멍하니 머릿속이 빈 느낌.
어쩌면 우리가 잃어버린 건 성취가 아니라, 내 감정과 연결되는 능력인지도 모른다.

더 큰 문제는, 이 사회는 ‘멈춘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유지하고 있는 삶조차 "정체"라고 여겨지고,
"그 자리에 머무르는 중이에요"라는 말에는 언제나 미안함이 따라붙는다.
하지만 삶이란 언제나 앞으로 나아가야만 의미 있는 건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무너지지 않고, 꾸준히 하루를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겐 이미 충분히 자격이 있다.

성장이 아닌 유지,
나아감보다 존재 자체에 더 집중하는 삶.
그것을 허용해주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감정을 회복하게 될지도 모른다.


6.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 된 사회

“무덤덤한 게 어른이야”라는 잘못된 인식

우리는 어릴 적부터 이런 말을 들으며 자랐다.
“그렇게 예민하게 굴지 마.”
“좀 참아야지, 다들 힘들어.”
“감정에 휘둘리면 안 돼.”
그러면서 우리는 조금씩 배웠다. 감정은 드러내기보다 숨기는 게 옳다고.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감정 절제’가 일종의 성숙의 증표처럼 여겨진다.
기쁘다고 너무 표현하면 가볍다고 하고, 슬프다고 울면 유난스럽다고 한다.
직장에서는 감정을 섞지 말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듣고,
가족 안에서도 슬픔이나 분노를 터놓기보다는 참고 조용히 넘기는 것이 미덕처럼 통한다.

문제는 이 과정이 반복되다 보면, 감정은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나아가 ‘느껴서도 안 되는 것’처럼 여겨진다는 점이다.
분명히 가슴 한구석이 먹먹하고, 이유 모를 눈물이 맺히는 순간이 있어도
“이 정도는 별일 아니야”라고 스스로 눌러버리는 것.
그게 어느 순간부터 자동 반응이 되어버린다.

이렇게 억눌린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말로 꺼내지 못한 감정은 몸 어딘가에 고여 있고,
결국은 무기력, 만성 피로, 또는 정서적 무감각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되돌아온다.
감정을 참는 것이 미덕인 사회에서, 우리는 점점 더 느끼는 능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무덤덤한 게 어른인 걸까?
아니다. 어른이라는 말은 감정을 없애는 능력이 아니라, 감정을 책임 있게 다루는 사람이라는 뜻이어야 한다.
기뻐도 좋고, 슬퍼도 좋다.
중요한 건, 감정을 숨기지 않고 그때그때 적절히 흘려보내는 것.
그게 오히려 더 건강한 감정의 순환이고, 진짜 성숙의 방향일지도 모른다.


7. 감정이 사라진 일상에 스며든 증상들

잠들지 못하는 밤, 이유 없는 피로감, 집중력 저하

감정은 흔히 마음의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사라진 감정은 가장 먼저 몸에 신호를 보낸다.

별다른 이유 없이 잠이 오지 않는 밤이 반복된다.
잠이 들더라도 깊게 자지 못하고, 새벽에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 다시 스마트폰을 든다.
아침이 되면 몸이 무겁고, 일어나기 싫고, 하루 종일 피로감이 가시질 않는다.
몸은 분명 자고 쉬었는데도, 왜 이렇게 늘 지쳐 있을까?

그 이유는 종종 감정의 부재에 있다.
감정을 오랫동안 억누르거나 무시하고 살아가면, 우리는 그 상태에 익숙해졌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몸은 계속해서 말하고 있다.
“지금, 뭔가 느끼지 못하고 있어요.”
“이대로 괜찮지 않아요.”

또한 사소한 일에도 집중이 되지 않고, 쉽게 산만해진다.
책을 펴도 몇 줄을 읽지 못하고, 업무 중에도 이유 없는 피로감에 한숨이 늘어난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있지만, 어떤 감정도 그 행동을 밀어주지 않으니
우리는 점점 더 동기 없이 움직이는 기계처럼 살아가게 된다.

가장 무서운 건, 이러한 증상들이 ‘버틸 수 있는 수준’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심각한 질병도 아니고, 병원에서 진단도 애매한 상태.
그래서 우리는 늘 “이 정도는 다들 겪는 거겠지”라고 넘긴다.
하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신호가 숨어 있다.
그건 바로, 감정이 충분히 흘러가지 못하고 막혀 있다는 사실.

마음의 언어를 잃어버린 사람에게, 몸은 유일한 번역기가 되어준다.
그래서 감정이 사라진 일상일수록, 몸의 신호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 피로함, 그 집중력 저하, 그 밤의 불면은 단순한 생활 습관의 문제가 아니다.
그건 아직도 내 안에 살아 있는 감정들이 보내는 마지막 신호일지도 모른다.


8. 무채색 감정에도 이름을 붙여보자

이유 없는 슬픔도 감정이다

가끔은 아무 이유 없이 슬프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 상처받은 것도 아닌데
어느 날 아침, 이상하게 마음이 꺼져 있는 날이 있다.
가만히 앉아 있는데 눈물이 맺히고,
웃어야 할 상황에서도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는다.

이럴 때 우리는 흔히 이렇게 말한다.
“왜 이러지? 아무 일도 없는데…”
“이 정도 기분은 감정도 아니지.”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유 없는 슬픔도, 설명할 수 없는 무기력도 분명한 감정이다.

감정은 꼭 원인이 있어야 존재하는 게 아니다.
행복이나 분노는 쉽게 알아차리지만,
막연한 불안, 알 수 없는 허전함, 이유 없는 무력감은 감정으로 받아들이지 않거나 무시해버리기 쉽다.
그렇게 이름 없는 감정들은 점점 더 우리 안에 뭉쳐져 가라앉는다.

그래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감정에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다.
"나는 지금 슬프다."
"아무 이유 없이 불안하다."
"잘 모르겠지만 마음이 조용히 무너지고 있다."
이렇게 말하는 순간, 감정은 비로소 존재를 허락받는다.

감정을 인지한다는 건 단순한 표현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건 곧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첫 걸음이기 때문이다.
무조건 긍정하려 하지 않아도 괜찮고, 해결하려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
단지 지금 내 안에 이런 감정이 있음을 알아차리고,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옆에 두고 지켜봐주는 것.

이 작은 인식만으로도
우리 안의 감정은 ‘쌓이는 감정’이 아니라 ‘흐를 수 있는 감정’으로 바뀐다.


9. 감정에 색을 입히는 작은 루틴

감정을 되살리는 일상의 작은 실험들

감정을 되살리는 건 거창한 변화가 아니라,
지극히 사소한 일상에서부터 시작된다.
무뎌졌던 감정의 결을 다시 만지기 위해 필요한 건,
의지가 아니라 '작은 습관'이다.

예를 들어,
매일 감정 한 줄 일기를 써보는 것이다.
‘오늘 느낀 감정 하나’만 짧게 적어보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허전함”, “안도감”, “질투”, “무력함”처럼 딱 한 단어만 써도 좋고,
“괜히 울컥했다”, “웃었지만 웃긴 건 아니었다” 같은 감정의 흔적을 붙잡는 문장도 좋다.
이 루틴은 내 안에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고 존중하는 연습이 된다.

또 하나, 감정을 말보다 글로 표현해보는 것.
말은 순간적으로 흘러가지만, 글은 나를 마주하게 한다.
노트 앱이든, 손글씨든, 몇 줄만 써도
마치 마음 안쪽에 있던 미세한 감정들이 단어의 옷을 입고 밖으로 나오는 느낌이 든다.
말할 수 없어 억눌렸던 감정들이
글을 통해 조용히 해방되곤 한다.

디지털 디톡스도 유용하다.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비교’와 ‘정보 과잉’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다.
잠깐의 고요 속에서, 내 안의 감정은 조금씩 다시 말을 건넨다.
“지금 진짜 피곤해.”
“사실 외로웠어.”
그런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려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무 목적 없는 산책.
무언가를 하려는 목적 없이 걷는 일은, 단순해 보여도 감정을 회복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발걸음과 함께 감정도 천천히 흐르고,
그동안 쌓여 있던 감정 찌꺼기들이 자연스럽게 흩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감정 단어 수집’을 해보자.
우리는 의외로 ‘기쁘다’, ‘슬프다’ 외의 감정 단어를 잘 알지 못한다.
'서운하다', '두렵다', '설렌다', '지겹다', '무난하다', '민망하다' 같은
다양한 감정 어휘들을 의식적으로 익히고 사용하다 보면,
내 감정도 더 섬세하게 인식되고, 더 진짜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이런 작은 루틴들은 거창하지 않다.
하지만 반복될수록, 무채색처럼 흐릿했던 내 감정에 서서히 색이 입혀진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상태’로 천천히 되돌아가게 된다.


10. ‘행복’이 아니라 ‘진짜 나’를 찾는 일

감정은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다

행복해지기 위해 애쓰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더 자주 지쳐 있다.
우리는 너무 오래, 너무 많이 "행복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며 자라왔다.
성공해야 행복하고, 사랑받아야 행복하고, 남들보다 더 나아야 행복하다는 기준은
어느새 나의 감정까지 외부에서 채점받는 것처럼 만들었다.

그래서 때로는 이런 질문조차 불편해진다.
“요즘 행복하세요?”
그 질문 앞에서 머뭇거리는 나를 보면, 왠지 모르게
‘내가 뭔가 잘못 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든다.
하지만 감정은 항상 밝고 긍정적이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기쁘지 않아도 괜찮고,
불안하거나 허전해도, 그것이 나라는 사람의 일부일 수 있다.
중요한 건 그런 감정을 억누르거나 없애려 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연습이다.
“나는 지금 이렇다”고 조용히 인정하는 순간,
그 감정은 더 이상 나를 삼키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가 된다.

사실 삶이란 늘 명확하지 않다.
기쁨과 슬픔, 성취와 불안, 몰입과 무기력이
뒤섞인 애매한 결들 사이에서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불행하지 않지만 행복하지 않은 그 흐릿한 감정들 또한,
충분히 진짜 삶의 일부다.

행복은 목적지가 아니라, 지나가며 잠깐 머무는 풍경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정말 찾아야 하는 건 "행복"이라는 성과가 아니라,
그 어떤 감정이든 진짜 나의 것으로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이다.

감정은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감정은, 그저 살아내는 것이다.
말없이 감정을 살아내는 하루하루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나답게 존재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결론: 감정 없는 시대에 감정으로 살아내는 용기

우리는 누구나 불완전하다.
가끔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감정이 들쑥날쑥하며,
어떤 날은 이유 없이 무너지고,
어떤 날은 별것 아닌 일에 벅차오르기도 한다.
그건 이상한 게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러운 인간의 모습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스스로에게 너무 엄격하다.
‘왜 이렇게 별일도 없는데 힘들지?’
‘이런 걸로 흔들리면 안 되는데…’
끊임없이 감정을 통제하려 하고,
어느 정도는 괜찮아야 하고,
어른답게 다루어야 한다는 압박을 스스로에게 가한다.

하지만 감정은 완벽하게 정리되거나 예측 가능한 게 아니다.
기분이 들뜨는 날도 있고, 바닥까지 가라앉는 날도 있다.
그러니 감정도 완벽할 필요는 없다.
조금 흔들려도, 울컥해도, 말문이 막혀도 괜찮다.
그저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드러내고, 살아내는 것 자체로
우리는 이미 충분히 건강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감정이 사라진 듯 보이는 시대 속에서,
여전히 감정을 느끼고, 받아들이고, 표현하려는 태도는
그 자체로 하루를 정직하게 살아가는 용기다.
남들이 말하는 감정의 모양이 아니라,
내 안에서 발견되는 감정의 색깔을
조금씩 알아가고, 지켜주고, 소중히 여기는 시간.

비록 그 색이 선명하지 않고, 뿌옇고 흐릿하더라도,
그건 분명 나만의 색이다.
그리고 그 색을 알아가는 여정은,
어쩌면 행복보다 더 중요한
‘진짜 나로 살아가는 삶’일지도 모른다.